6월항쟁 TIME-LINE
1987.01.14 - 박종철군 고문으로 사망
박종철군 고문으로 사망
서울대생 박종철군,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받던 중 고문으로 사망
1987.02.07 - 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
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
`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에 대한 경찰의 원천봉쇄로 전국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 경찰 799명 연행
박종철의 유해는 1987년 1월 16일 사실상 경찰에 의해 화장되었고, 임진강에 뿌려졌다. 아버지 박정기는 ‘종철아! 잘 가 그래이 …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라고 깊은 한을 표현했다.
대학생들은 17일부터 24일까지 ‘박종철 군 추모제’를 지내고, 그의 무참한 죽음을 위로하며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종교계와 사회단체도 사람이 고문으로 유명을 달리하는 시국을 개탄하며, 다양하게 항의했다. 그럼에도 경찰은 박종철의 시신을 검안한 의사를 협박하는 등 은폐 작업을 중지하지 않았다.
시민사회의 들끓는 여론을 결집하여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고문공대위)가 추모행사를 개최하기로 했다. 고문공대위는 「민주화청년연합」 의장 김근태가 박종철이 사망한 건물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 사실을 폭로한 것을 계기로 1985년 11월 결성되었다. 그런데 고문공대위의 역량은 충분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회단체와 재야 그리고 야당 등이 참여하는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2월 7일 명동성당에서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를 열기로 했다.
경찰은 국민추도회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명동성당 일대는 물론 학생과 시민이 모일만한 장소들에서 검문·검색을 했다. 철통 봉쇄를 했지만, 명동성당에서는 800여 명이 모여 추도회를 열었다. 이날 부산, 광주, 대구, 인천 등 전국의 주요 도시들에서도 크고 작은 추모행사가 개최되었다.
1987.03.03 - 박종철군 49제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
박종철군 49제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
`박종철군 49제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이 경찰의 원천봉쇄로 저지되자,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거리시위, 439명 연행됨
1987년 3월 3일은 박종철이 사망한지 49일째 되던 날이었다. 49재는 불교계에서 매우 중요시 되는 추모의례였는데, 그의 부모님은 불교 신자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불교계 단체들이 「고 박종철 영가 49재 봉행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준비위원회는 3월 3일 조계사에서 재를 지내고,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는 파고다공원에서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을 개최하기로 했다. 하지만 경찰은 두 행사 모두를 불법 집회로 규정했다. 경찰은 행사 장소들을 봉쇄하고 폭력적으로 해산작전을 펼쳤다.
시민들은 경찰이 쏜 최루탄 가스로 고통을 호소했고, 도심은 혼란스러웠다. 시민들은 행사 참가자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체포하는 경찰에게 항의하고 야유했다. 이러한 상황은 전국 곳곳에서 동시에 펼쳐졌다. 전국 46개 대학의 학생들은 공권력의 부당한 행위를 규탄하는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공권력의 통제로 부산 사리암에서만 고 박종철 군 49재가 거행되었다.
1987.04.13 - 전두환 대통령 4·13 호헌 조치
전두환 대통령 4·13 호헌 조치
전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해 `개헌논의 유보` 성명, `현행헌법으로 정부이양`, `대통령 선거 연내 실시` 발표(4·13 호헌 조치)
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촉박한 임기와 현재의 국가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은 평화적인 정부 이양과 서울올림픽이라는 양대 국가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 논의를 지양할 것을 선언합니다.
본인의 이 결단은 오늘의 망국을 타개하고 국가 목표를 수행하는 데 현실적으로 최선의 길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서 국민 여러분께서 전폭적인 도움과 신뢰를 보내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자 합니다.
2가지의 국가 대사를 완성한 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개헌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한 좋은 방안이 발견될 수 있을 것으로 본인은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제 우리의 정치도 나라와 사회 성장발전에 부응하는 선진 정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신념에서 본인은 남은 기간 동안 민주발전의 기반을 더욱 넓히고 사회 안정과 국민 화합을 다지기 위한 조치들을 더욱 과감하게 추진해 나가고자 합니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본인은 국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지방자치제를 강제적으로 실시해 나갈 계획입니다. 이 문제가 조속히 매듭지어져서 본인의 임기 내에 지방 자치가 시작된다면 민주 발전을 위한 또 하나의 튼튼한 토대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제는 우리의 정치도 시대의 변천과 사회의 발전에 따라 꾸준한 신진대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낡은 시대의 낡은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인물에게 발전하는 나라의 장래를 의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전환기의 정치를 이끌어나갈 참신하고 유능한 정치 신진들을 광범위하게 포용하고 육성하는 정당의 노력은 매우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전두환
1987.05.20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박종철 사건 진상조작 폭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박종철 사건 진상조작 폭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축소·조작되었으며, 전범이 따로 있다`는 내용의 성명 발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축소·조작되었으며, 전범이 따로 있다’는 내용의 성명 발표 – ‘정토구현전국승가회’, ‘민불련’ 등 90여 명, 5·18 추모법회 중 경찰의 광주 원각사 난입에 항의하며 서울 개운사에서 농성
1987.06.09 - 이한열 열사 최루탄에 피격
이한열 열사 최루탄에 피격
연세대생 이한열 군, 학교 앞 시위 중 최루탄에 부상
1987.06.10 - 명동성당 농성
명동성당 농성(1987.06.10-15)
시민과 학생은 6월 10일 서울의 도심지 곳곳에서 ‘고문살인 은폐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했다. 시위대는 경찰의 진압을 피해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시위대가 경찰의 무장을 해제시키기도 했으나, 진압작전을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을지로와 명동 입구 일대의 시위대는 경찰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명동성당의 시위대는 8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11일 오전에 명동성당에서 빠져나가려 했으나, 경찰의 봉쇄와 연행 작전으로 일부만 겨우 성공했다. 명동성당에 잔류한 760여 명의 시위대는 계획과 준비 없이 예기치 않은 농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사실상 고립되어 있었으며,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민운동본부)로부터 배척받기도 했다. 정부와 경찰은 농성자들을 연행할 것이라고 수시로 겁박했다. 경찰이 명동성당으로 진입을 시도하거나 최루탄을 투척하는 바람에 명동성당 입구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명동성당 인근에서 근무하던 수천 명의 회사원과 사무원들은 경찰의 시위 진압을 규탄했다. 계성여고 학생들은 도시락을 모아 농성자들에게 전달하는 미담을 남겼다. 안기부와 경찰의 최고위급 간부들이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와 압박을 가하고 프락치를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했으나, 천주교계와 농성자들은 굳건히 맞섰다. 6월 14일 농성자의 수는 35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정부는 다음 날까지 해산하는 것을 조건으로 농성자에 대한 사법적 처벌을 유예할 것임을 통보했다. 6월 15일 농성자들은 2차례에 걸친 투표를 통해 농성을 풀 것을 결정했다. 이들은 ‘명동투쟁 민주시민, 학생일동’ 명의의 유인물을 배포하고, 2만 여 명의 시민들에게 둘러싸여 농성을 해제했다.
1987.06.26 -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
6월민주항쟁의 마지막 대규모 집단 항거는 6월 26일에 이루어졌다. 전두환은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을 중단시킬 목적으로 종교계 인사들과 시국수습에 관한 간담회를 개최했지만, 항거를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대규모 경찰 병력이 동원되어 집회 예정지나 주요 관공서를 경비하고 검문검색을 했으며, 대학 학생회와 동아리 등을 수색했다.
그 외에도 대통령과 당국은 국민평화대행진이 실행되지 못하도록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는데, 항거는 서울을 비롯해 전국의 시와 군에서 전개되었다. 공권력이 주목한 곳은 최종 집결지로 예정되었던 파고다공원과 명동성당 일대였다.
1차 집결지들에서도 경찰과 시위대의 공방이 치열하게 펼쳐졌으며, 시민과 학생은 여기저기로 이동하면서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 그리고 “직선제 쟁취”와 “한열이를 살려내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고등학생들도 다수가 시위를 벌였고, 밤이 되자 노동자와 직장인도 시위에 동참했다. 국민평화대행진의 전개는 지역에 따라 다소 편차를 보였으나, 자정을 넘겨서까지 진행된 지역들도 있었다.
* 수원 북수동 성당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를 마친 신부·수녀와 7000여 명의 군중이 수원역으로 행진. 밤 11시 1만여 명의 시민이 수원역에서 집회, 남문시장 안 노점상 50여 명이 자체적 시위 벌이며 학생들에게 동참을 촉구.
* 성남 ‘성남지역 민주화연합(의장:이해학 목사)’이 ‘평화대행진’ 선포, 3만여 시위대 평화행진, 자정 무렵 해산. 이후 시내곳곳에서 새벽 3시까지 산발적 시위 계속, 중앙파출소 점거. ‘노동3권 보장’, ‘저임금 박살’ 등의 구호 등장.
* 인천 경찰의 원천봉쇄 속에서도 1만여 명의 시민·노동자·학생들이 도로를 완전점거한 가운데 시위,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지속, 부평로의 대중집회에서 ‘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의 창립보고대회 개최.
* 안양 대학생·노동자 4000여 명이 오후 8시경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철야 시위.
* 부산 오후 4시경 신부 70여 명, 수녀 700여 명과 신도 등 2500여 명이 중앙 성당에서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특별미사’ 거행. 미사후 가톨릭센터 앞까지 침묵시위. 이후 부산시내 전 지역에서 27일 새벽 2시까지 시위 지속.
* 마산 국민대회에 앞서 경찰책임자와 ‘무탄무석’을 약속한 후 촛불행진, 다음날 새벽까지 평화적인 시위가 계속됨.
* 대구 4만여 명의 시민이 참여 유신학원 네거리-반월당 네거리-명덕로터리-수도산 사이의 간선도로 등에서 27일 새벽 1시 30분까지 시위, 가장 격렬한 양상 전개.
* 대전 시내 중앙로, YMCA 앞 원동 4거리, 가톨릭 문화회관 앞, 선화교 등에서 연 인원 5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오후 11시 20분경 까지 시위. 경찰은 오후 9시경부터 충남국민운동본부·대전인권위원회·충남민청의 전화를 불통시킴.
* 광주 6시경 원각사 앞, 5·18 유족회·국민운동전남본부 중심으로 2000여 명 시위. 7시경 한일은행 사거리 일대 10만여 명 운집 시위, 27일 새벽까지 산발시위 계속, 26일의 시위는 20~30만에 달하는 최대 규모의 시위.
* 전주 농민·학생·시민 등 2만여 명이 7시에 관철동 네거리를 점거 연좌,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전북본부’ 주도하에 ‘민주헌법쟁취 전북도민평화대행진’ 발대식을 갖고 10만으로 늘어난 시위대와 함께 서광중학교 앞까지 대행진을 강행.
* 춘천 명동 입구에서 개최하려던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이 봉쇄되자 오후 11시20분까지 시내 곳곳에서 산발 시위.
6월민주항쟁의 개요
6월 항쟁(六月抗爭)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으로 6월 민주항쟁, 6.10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6월 민중항쟁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